‘트럼프의 남자’가 꿈꾸는 미국 네트워크 정책
2017년 ‘망중립성 폐지’ vs. 2018년 ‘인터넷 사업자의 통신시장 진출 지지’
트럼프의 남자 ‘아짓 파이(Ajit Pai)’
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이하 FCC)는 트럼프 시대에 어떤 행보를 걷게 될까요? 막연한 질문이지만 우문현답처럼 해답을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FCC 의장으로 선출한 아짓 파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는 방법이지요.
사실 아짓 파이의 가치관을 알기는 무척이나 쉬운데요. 그 이유는 그의 경력에서 단 한 줄만 읽어도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바로 미국의 대표적인 통신사업자인 버라이즌(Verizon)에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전무로서 법률 자문을 한 바 있습니다. 이로 인해 아짓 파이가 네트워크 정책을 검토할 때 통신사업자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바마 정부 시절 톰 휠러(Tom Wheeler)의 뒤를 이어 차기 FCC 수장으로 지목되자 인터넷 사업자(Contents Provider, 이하 CP)들의 산실인 실리콘밸리가 시끄러워 지는 것은 당연했죠.
“형이 왜 거기서 나와……”
트럼프 정부 FCC 의장으로 임명된 아짓 파이(출처: AP)
2017년 아짓 파이가 주도한 망중립성(Net Neutrality) 폐지
실리콘 밸리가 우려하던 악몽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습니다. 아짓 파이는 2017년 1월 FCC 의장으로 임명된 이후 한달 만에 공식석상에서 망중립성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며, 망중립성을 폐기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냈습니다. 2017년 2월 아짓 파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obile World Congress, MWC)의 기조연설 발표에서, 망 중립성에 대해 ‘실수’라고 직접적으로 의사를 피력한 것이죠. 통신사업자에 근무한 경력으로 인해 망중립성 반대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고, 트럼프 정부가 아짓 파이를 FCC 의장으로 임명할 때부터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져 왔으나 생각보다 신속한 입장 표명에 모두 당황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2017년 5월. 아짓 파이가 ‘인터넷 자유 회복(Restoring Internet Freedom)’이란 제목으로 망중립성 폐기안을 FCC에 제출했습니다. 시민단체와 민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7년 12월 망중립성 폐기안이 가결되었습니다. 2010년부터 오바마 정부가 주창해온 망중립성이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되어 버린 것이죠.
★★ 잠깐 상식★★
버거킹에서 돈을 많이 낸 사람이 와퍼를 먼저 받게 된다면?(‘와퍼중립성’으로 쉽게 이해하는 ‘망중립성’)
출출한 점심시간이네요. 눈 앞에 보이는 버거킹에 들어갑니다. 당연히 와퍼를 주문하죠! “와퍼 세트 하나요.” 캐셔가 가판대에 세워진 푯말을 가리키네요. 읽어보니 새로운 옵션이 나왔나 봅니다.
저는 단지 예전처럼 와퍼 세트 하나를 먹고 싶을 뿐인데 말이죠.
와퍼 제공속도별 가격표(출처: 버거킹)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읽어보니 MBPS(Making Burgers Per Second, 초당 햄버거 생산율)에 따라 가격이 다르네요. 그래도 크기와 모양이 같은 햄버거를 받는 속도차이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5배 이상 돈을 지불할 수 없어 Slow MBPS를 고릅니다($4.99). 그런데 방금 들어온 어떤 아저씨가 Hyperfast MBPS($25.99)를 고르더니 돈을 지불하자마자 와퍼를 바로 받아가네요. 화가 나서 따지지만 이제 먼저 주문한 순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기다리던지 돈을 더 지불하라고 하네요. 필요한 것이 있는 사람이 약자이니 참고 기다려봅니다.
위 이야기에서 버거킹을 통신사업자, 햄버거를 콘텐츠, 햄버거 제공 속도별 가격표를 콘텐츠 제공속도별 가격표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면 망중립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유튜브를 클릭하는 순간 내가 원하는 영상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었으나, 망중립성이 폐지되게 된다면 내가 콘텐츠를 제공받기 위해 어떤 가격을 골랐느냐에 따라 콘텐츠 제공 속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죠. 반면 망중립성이 적용되면 와퍼 세트 가격만 지불하면 줄을 선 순서대로 와퍼를 먹을 수 있듯이, 콘텐츠를 클릭하면 차별과 차단없이 콘텐츠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됩니다.
2018년 CP의 통신서비스 진출 지지
그런데 말입니다. 망중립성 폐지를 통해 통신사업자의 손을 들어줬던 아짓 파이가 2018년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의아함을 자아냈습니다. 바로 통신사업자의 전문 분야인 통신서비스를 CP가 제공하게 해달라고 지지 성명을 밝힌 것이죠. 지지의 대상이 된 CP는 ‘스페이스 익스플로레이션 홀딩스(Space Exploration Holdings)’인데요. 이 회사는 엘론 머스크(Elon Musk)가 우주산업을 진행하고 있는 회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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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무국의 우수한 위성 엔지니어링 전문가가 신청서에 대한 면밀한 검토 후 동료들에게 신청서를 지원하고 지방의 미국인들에게 초고속 인터넷을 제공하기 위해 위성 배치에 힘을 모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신청서가 채택된다면 미국 회사가 차세대 저궤도 위성 기술을 사용하여 광대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첫 번째 승인이 될 것입니다.
(원문) Following careful review of this application by our International Bureau’s excellent satellite engineering experts, I have asked my colleagues to join me in supporting this application and moving to unleash the power of satellite constellations to provide high-speed Internet to rural Americans. If adopted, it would be the first approval given to an American-based company to provide broadband services using a new generation of low-Earth orbit satellite techno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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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짓파이가 작성한 지지 성명서 내용(출처: techcrunch)
구체적으로 신청서를 살펴보면 엘론 머스크는 4,425개의 인공위성을 활용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제공을 위해 2016년 11월 고정 위성 서비스(Fixed-Satellite Service)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만약 FCC가 신청을 승인해줄 경우 엘론 머스크는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국내의 SKT, KT, LGU+처럼 통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서비스 명칭은 ‘스타링크(Starlink)’로 내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짓 파이의 지원으로 이 CP의 통신서비스 제공계획은 생각보다 쉽게 FCC의 승인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FCC에 신청한 인공위성 기반의 통신서비스 운영 허가 신청서 중 일부(출처: FCC)
아짓 파이의 의중과 미국 네트워크 정책의 미래는?
아짓 파이의 이력을 고려해 행보를 살펴보면 ‘스페이스 익스플로레이션 홀딩스’에 대한 통신서비스 지지는 CP가 통신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도와준 형국이게 많은 의문이 들게 합니다. 아짓 파이는 단순히 통신업계를 대변하는 인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죠. 아짓 파이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빅픽처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망중립성 폐지로 뿔이 난 CP에 대한 일시적인 당근 정책인 것일까요? 혹은 통신망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불도저 전략인 것일까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아짓 파이의 의중이 무엇일지 고민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2018년 미국 네트워크 정책의 미래를 엿보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함께 살펴보고, 의심하고, 상상해보시죠.
- (1안) 통신망 확대면 ‘알 이즈 웰(ALL IS WELL)’
2017년 아짓 파이가 ‘망중립성 폐지’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근거로 제시한 것은 ‘더 빠르고 저렴한 인터넷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는데요. 당시 그의 주장과 근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을 확대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정책에 대해서는 지지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스타링크’ 지지 성명서도 미국의 지방지역까지 초고속 인터넷 보급할 수 있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요. 만약 이 것이 사실이라면, 구글(Project Loon)과 페이스북(internet.org) 그리고 스페이스 익스플로레이션 홀딩스(Starlink) 등 다양한 CP들이 정책적 환경을 잘 활용해 인터넷 보급 계획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 (2안) 뿔이 난 CP 달래기.
2017년에는 망중립성 폐지로 통신사업자의 손을 들어주었죠. 하지만 미국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등 전세계를 주름 잡는 CP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쪽에 치중된 정책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창하는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에 따른 경제 붐업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대선과정에서 실리콘밸리 인사들은 민주당을 지지했으며, 2017년 6월 파리기후협약 당시 엘론 머스크가 자문역을 사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충돌한 바 있는데요. 나스닥 시가총액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CP의 마음을 돌리고자 FCC는 망중립성 폐지 이후 몇몇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경우 CP는 단순히 통신망 제공 계획뿐만 아니라 정치권과의 협의를 통해 어떤 부분들을 얻어낼 수 있을지 빠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커넥팅랩 민준홍